교사교육대회

교사교육대회

우리나라에 교회가 설립되면서부터 시작한 일은 성경공부이다. 주일마다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일학교가 조직되었으며 부정기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경회를 열었던 것이다.
1907년 “대한민국 예수교장로회”가 조직되었던 해의 통계표에 의하면 주일학교수가 1022교로 학생 수는 72,968명으로 이 숫자는 그 해의 교회와 교인 수를 나타내는데 곧 교인 전체가 주일학교 장년부 ~ 유년부에 속하여 성경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성경을 열심을 가지고 가르친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경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만 잘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경을 가르침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장16절17절)한 뜻을 살리려는데 있다.

우리 교회에서 주일학교 사업이 조직화됨에 따라 1907년 5월 18일~23일 로마에서 열린 제5회 세계주일학교대회에 尹致昊씨가 참석하여 실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0년 10월 5~14일 일본에서 열린 제8회 대회에는 40여명이 참석하였었으며 이에 자극을 받아 전국적, 세계적 기구에 유대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21년 전국주일학교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장소는 YMCA, 태화관, 승동교회당이었고 참가인원은 2 천여 명이었으며 대회장에는 남궁혁 목사가 추대되었었다.
제2회 대회는 1925년 서울에서
제3회 대회는 1929년 평양에서
제4회 대회는 1933년 대구에서 이렇게 제4회 대회를 치룬 후에는 조선총독부의강압으로 대회가 중단되어오다가 1964년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주최한 제5회대회는 31년만에 열린 대회였다.

역사적으로 하나의 한국장로교회가 해방 후 4분 5렬 되는 불행한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1959년 제3차 분열은 WCC 운동에 대한 견해 차이에 있는 것이다. 우리총회는 WCC적 에큐메이컬 운동을 반대하는 처지를 밝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초교파적인 주일학교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따로 장로회 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주일학교 대회란 명칭을 전국주일학교 교육대회로 개칭하여 지금까지 전국대회가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제시대에 있어서 주일학교 사업은 민족정신 보존에 커다란 의의와 공헌을 쌓았다고 본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총독정치는 우리의 민족정신 말살에 중점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교육을 통하여 우리 겨레에게 “자유인” 육성을 위한 성의를 기울였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조선 총독부는 우리 민족에게 황민화정책을 강요하며 우리말과 글의 교육을 금하며 심지어 우리 이름을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 시킨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도 교회에서만은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주일학교는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보존하는데 숨은 공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59년 이후 우리의 주일학교 교육대회는 신앙노선 확립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믿는다. 세속적인 넓은 길보다도 좁으나 높은 곳을 향하여 전진하는 순례자의 길을 택해 온 교육대회 초창기에 있어서는 무척 외로웠었다. 
이처럼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주일학교를 지켜온 선배들의 신앙을 본받아 주일학교 부흥의 사명과 학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할 사명을 가진 교사들이 교사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키 위하여 전국주교 교사수양회와 전국주일학교 교육대회에 참가하는 가운데 “일어나라! 함께 가자! 새 천년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2000년 8월 8일 사랑의교회 수양관에서 열렸던 제14회 교육대회(대회장 천충길)까지 이어져왔다. 

전국주일학교 교사교육대회  

제1회 1920년 11월 2일 ~ 9일 서울 경복궁 

제2회 1925년 10월 21일 ~28일 서울 새문안교회 

제3회 1929년 10월 9일 ~ 19일
 평양 숭실대, 장대현 

제4회 1933년 10월 6일 ~ 18일
 대구